본문 바로가기

Music Column/Feature

모타운(Motown)과 Funk


큰소리 Funk! Funk!⑤ - 모타운(Motown)과 Funk




1961년, '흑인 유화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민주당은 케네디를 앞세워 기존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을 밀어내고 집권에 성공한다. 그리고 기존의 공화당과는 달리 민주당이 흑인 유화정책을 펼치면서 마틴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와 말콤 엑스(Malcolm X)라는 강력한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인권운동은 탄력을 받게 된다. 이러한 흑인사회의 새로운 물결은 흑인 중산층의 비즈니스 활동을 예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베리 고디(Berry Gordy, Jr.)의 모타운(Motown)이 있었다.

'알앤비 음악의 성지'라고 불리는 모타운은 디트로이트의 창고에서 베리 고디에 의해 설립되었다. 최초의 흑인 사업가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음악 레이블인 모타운은 흑인들의 성공을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홀랜드-도지어-홀랜드(Holland-Dozier-Holland)로 대표되는 작곡가와 프로듀서, 그리고 훵크 브라더스(Funk Brothers)와 같은 세션 뮤지션들의 분업을 통해 만들어낸 모타운의 음악은 대중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마빈 게이(Marvin Gaye),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과 같이 스스로 곡을 쓰면서 누구보다 트랜드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선도해나갔던 아티스트들이 있었기에 모타운은 더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타운은 비틀즈(Beatles)와 더불어 60년대의 미국 음악 시장을 점령하다시피 한 것이다.  


Motown Founder 'Berry Gordy, Jr.'



빌보드 핫 100 (Billboard Hot 100) 차트 1위를 차지했던 60년대 모타운의 곡

1961년 Please Mr. Postman - The Marvelettes ** 
1964년 My Guy - Mary Wells **
1964년 Where Did Our Love Go - The Supremes *
1965년 My Girl - The Temptations **
1965년 Stop In The Name Of Love - The Supremes *
1965년 I Can't Help Myself (Sugar Pie, Honey Bunch) - Four Tops *
1966년 You Can't Hurry Love - The Supremes *
1968년 I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 - Marvin Gaye ***
1969년 I Want You Back - The Jackson 5
1969년 Someday We'll Be Together - Diana Ross & the Supremes

Composer: *Holland-Dozier-Holland, **smokey robinson, ***Norman Whitfield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이 일어난 이후에도 민주당은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69년까지 집권당을 유지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을 통해 흑인들은 또 다른 인종차별을 겪으면서 점차 민주당에 등을 돌리고 공화당을 선택했다. 재미있는 것은 민주당이 집권 유지에 실패했을 시기와 맞물려 모타운 역시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68년 모타운의 대표 프로듀서였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가 자신들의 저작권을 요구하며 모타운에 등을 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모타운의 인기는 하락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4년에는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의 뒤를 잇는 여성 싱어인 마사 리브즈(Martha Reeves)가 모타운을 떠나고, 템테이션즈(The Temptations)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더 포 탑츠(The Four Tops)와 글래디스 나이트 앤 더 핍스(Gladys Knight and The Pips) 역시 모타운을 등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5년에는 잭슨 파이브(Jackson 5)조차 모타운을 떠나게 되면서 모타운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라는 위대한 스타의 탄생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Motown의 대표 작곡가들이었던 'Holland-Dozier-Holland'

이렇게 공화당이 집권하고 모타운이 쇠락의 길로 접어들 시기에 미국에서는 훵크라는 새로운 음악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흑인들의 자존감에서 탄생한 훵크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화당의 구미에 딱 맞는 음악이었다. 훵크와 같은 신나는 음악이 사람들을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훵크는 공화당의 바람과는 다르게 오히려 흑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하여 그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게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어쨌든 훵크라는 새로운 음악이 70년대 주류를 형성하게 되자 베리 고디 역시 그 주류에 맞춰가려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모타운의 히트곡 중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홀랜드-도지어-홀랜드가 빠져나가면서 베리 고디는 그 자리를 매워 줄 새로운 프로듀서가 필요했다. 마침 이 시기에 맞물려 새롭게 등장한 스타 프로듀서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노만 위트필드(Norman Whitfield)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훵크 황금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다. 60년대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사이키델릭의 유행은 결정적으로 비틀즈(Beatles)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사이키델릭의 영향은 자연스럽게 흑인음악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유행의 중심에는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 슬라이 스톤(Sly Stone) 등 거장이 있었다. 그리고 위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은 뮤지션 노만 위트필드(Norman Whitfield)가 있었다.

모타운의 일개 사원에 불과했던 노만 위트필드가 주로 맡았던 일은 홀랜드-도지어-홀랜드(Holland-Dozier-Holland)와 같은 스타 프로듀서가 만든 곡을 어레인지하는 것을 비롯한 잡다한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만 위트필드는 모타운의 다른 프로듀서들과 공동작업을 하게 됨과 동시에 베리 고디(Berry Gordy)의 신임도 얻게 된다. 그리고 1966년, 노만이 만든 템테이션즈(The Temptations)의 "Ain't Too Proud to Beg"가 히트하면서 당당히 모타운의 스타 프로듀서 군단의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노만 위트필드(Norman Whitfield)

1969년작 템테이션즈의 [Cloud Nine]을 시작으로 사이키델릭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노만 위트필드는 1970년작 [Psychedelic Shack]와 1971년의 [Puzzle People], 그리고 1972년에 발표한 [All Directions]까지 연달아 성공하면서 템테이션즈에게 제2의 전성기를 안겨주었다. 템테이션즈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의 음악 스타일을 확립시킨 노만 위트필드는 자신의 음악을 사이키델릭 소울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홀랜드-도지어-홀랜드가 없는 모타운이 70년대까지 무너지지 않고 레이블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이 사이키 델릭 소울의 역할이 컸다. -후에 노만 위트필드는 자신의 직접 프로듀싱하고 밴드의 일원으로도 참여한 레어 어쓰(Rare Earth)와 더 언디스퓨티드 트루쓰(The Undisputed Truth)을 통해 P-funk 사운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P-funk 연주자들과 협연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노만 위트필드는 여전히 모타운에서 크게 주목받는 프로듀서는 아니었다. 모타운 역사의 초점은 보통 60년대로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빈 게이(Marvin Gaye)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가 버티고 있는 70년대의 모타운 시절 역시 노만 위트필드는 그렇게 돋보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프로듀서임과 동시에 훌륭한 연주자였던 노만 위트필드는 이렇게 평가 절하되어 왔다. 사실 모타운에서 평가절하가 된 뮤지션은 노만 위트필드 뿐만이 아니었다. 모타운의 베이시스트, 제임스 제이머슨(James Jamerson)으로 대표되는 훵크 브라더스(Funk Brothers)의 연주자들은 개개인이 곡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대개 세션 연주로 먹고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앨범의 라이너 노트에도 거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모타운의 성공 이면에는 이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했던 것이다. 스타급 뮤지션들에게는 그만큼 보상이 이루어졌으나, 그렇지 못한 뮤지션들에 대한 대우는 처참할 정도였다(관심있는 분들은 훵크 브라더스에 관한 다큐멘터리 ‘Standing in the shadows of Motown’을 찾아 보시길 권한다.). 


Funk Brothers with Stevie Wonder

결국, 내부적으로 결속력이 돈독하지 못했던 모타운은 곧 서서히 침몰하기에 이른다. 1977년에는 베리 고디의 오랜 친구였던 스모키 로빈슨(Smokey Robinson)이 콜롬비아(Columbia)로 이적했고, 템테이션즈는 아틀랜틱(Atlantic)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삼는다. 80년대 들어서는 다이애나 로스(Diana Ross)와 마빈게이 역시 모타운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부터 삐걱거렸던 모타운 레코드는 황금기 시절을 재현하지 못한 채 마침내 1988년 MCA에게 팔리게 된다.  



기사작성 / RHYTHMER.NET 현승인
- Copyrights ⓒ 리드머(www.rhythmer.net)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모든 리드머 콘텐츠는 사전동의 없이 영리적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