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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예술을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구나 - 원로 연극인 김창일



예술을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구나

목포 원로 연극인 김창일 

 

인터뷰/글 : 현승인 (funkaline@gmail.com)



- 나 이제 내 하고 싶은 연극 할라요.

 

Q. 선생님께서 처음 연극을 시작할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김창일 : 내가 목포고등학교를 다녔을 때, 연극협회 목포지부장이 김길호 선생님이었어요. 1972년도인가? 연도는 확실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김길호 선생님이 가시고 내가 목포지부장을 맡았었죠. 당시 목포 연극 문화가 어땠냐면 60년대에 목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룰 할 정도였어요. 이걸 말하면 다들 깜짝 놀라요. 물론 그 때는 극장도 없었고 연극인도 별로 없어서 미술협회회원들이 배우를 할 정도로 어려운 실정이었지만요. 저는  이런 연극을 고등학교 때 보면서 연극이 너무 하고 싶더라고요. 근데 당시에 연극영화과를 가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집에서 보내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Q. 집에서 반대를 많이 했다는 말씀이시죠? 그런데 어떻게 연극을 하시게 된 건가요? 

 

김창일 : 내가 65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 때 당시에 누가 집에서 연극영화과를 가라고 하겠어요. 그래서 내가 너무 걱정을 많이 했지. 그러다가 시험을 치러 서울을 갔어요. 집에다가는 한양공대에 시험을 치러 간다고 하고 갔어요. 그 때는 대학 시험이 전기, 후기로 나뉘어져있었는데, 한양공대는 후기였어요. 연극영화과는 다 전기였고. 연극영화과도 그 때 5개 밖에 없었어요. 

 

Q. 전국에요?

 

김창일 :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은 서울 밖에 없었어요. 그 뒤로도 한참 그랬어요. 서라벌 예술대학하고 중앙대, 동국대, 단국대, 한양대 이렇게 다섯 군데 밖에 없었어요. 그 이상은 나라에서 인준을 안 해주니까. 그래서 서라벌 예술대학 같은 경우에 경쟁률이 14.2대 1인가 될 정도로 높았어요. 내가 서라벌 예대가 4년제로 된 후 두 번째로 입학을 했어요. 근데 합격을 한 거예요. 문제는 한양공대 시험을 보기 전에 서라벌 예대 학비를 내야 돼. 합격은 됐는데, 학비를 내야하나 말아야하나 엄청나게 고민을 하다가 결국 한양공대 시험을 안 봐버렸어요. 그러면서 부모님한테는 한양공대 다닌다고 말하면서 보내주신 학비로 서라벌 예대 1학기를 다녔어요. 근데 여름 방학에 학교에서 2학기 등록금을 내라고 집에다가 통지서를 보낸 거지. 집에서 그걸 봐 버린 거예요. 보니까 무슨 서라벌예술... 집에선 깜짝 놀란 거예요. 근데 방학 때 집을 내려갔더니 아무 말 않더라고. 아버지가 알았으면서도 아무 말을 안 해요. 그러다가 “니가 그렇게 원했응께, 한번 해봐라.” 하시더라고.  

 

Q. 지금도 대학에서 연극하는 친구들이 많이 힘들어 하고 있는데요, 당시엔 더욱 힘들었을 것 같아요. 

 

김창일 : 힘들었죠. 대학에 가서 연극이 돈이 되는 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래도 내가 좋으니까 했죠. 그렇게 학교를 4학년 1학기까지 다니다가 군대를 갔어요. 군대를 갔다 오니까 서라벌 예대가 중앙대가 되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4학년 2학기니까 딱히 할 것도 없었지. 졸업작품을 옛날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어요. 그러다가 졸업을 했는데, 연극만 하고 살려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연극만 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나마 주는 돈도 액수가 차비도 안 돼요. 정말 어려워서 이불 보따리 싸들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왔죠. 다시는 연극 안하겠다고 왔지. 내려와서 김길호 선생님한테 “나 연극 안할라요. 돈이 없어서 못하겠어요.” 그랬지. 

 

Q. 그런데 어떻게 다시 연극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김창일 : 그 때 우리 작은 아버지가 장사를 했어요. 그래서 작은 아버지 밑에서 일을 도왔어요. 월급을 많이 줬어요. 그러다가 김길호 선생님이 써놓은 단막극이 있으니, 그걸 같이 하자고 계속 그래서 결국 하기로 했지. 목포축제 때 하는 거였어요. 그 때 목포축제가 어땠냐면 국회의원이고 기업인이고 다 명찰 달고 참석을 하는 목포에서 제일 큰 축제였어요. 거기서 연극을 하기로 한 거예요. 작은 아버지한테는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갔고 내가 조문을 가야겄습니다. 내일 출상인께 꼭 가야합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걸 들으시고 작은 아버지가 부조금까지 봉투에다 넣어서 쥐어줬어요. 그걸 받고 전 연극을 하러 갔죠. 그 때 내 첫 씬이 신문지를 펴서 보는 장면이었는데, 신문에 뚫어놓은 구멍 사이로 관객이 보여요. 근데 보니까 우리 작은 아버지가 저기 계시는 거야. 우리 작은 아버지가 목포에서 통이 좀 있었거든요. 초대를 받아가지고 앉아 계시는 거예요. 이러니 연극 할 맛이 나겠어? 부조금까지 받아가지고 왔으니. 우리 작은아버지가 불같은 성격이었어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연극을 했지. 지금도 양심에 찔려요. 작은아버지한테 부조금 받아가지고 친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달려간 놈이 이 연극을 하고 앉아있으니. 그 뒷날 집엘 들어가는데 작은 어머님이 “아야, 저거 양주 파는 술집 가봐라, 느그 작은 아버지가 너 오면 거기로 오라하드라.” “나 혼나라고 그라요? 나 안갈라요. 나 이제 내 하고 싶은 연극 할라요.” 그랬거든. “아니 고거는 아닌 것 같드라.” 하도 가라 그래서 그 술집을 가니까 작은 아버지랑 목포에 국회의원이고 기업인이고 다 같이 앉아서 양주를 마시고 있는 거예요. 근데 거기서 한 기업인이 나한테 기업가로서 연극을 보고 너무 많이 깨우쳤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작은 아버지가 완전히 기분이 좋아졌어. 

 

 

 

<'전무송김창일김길호'> 목포 공연을 보고. 왼쪽부터 전무송, 김창일, 김길호 ⓒ 김창일 

 

 

 

- 당신이 이제 와서 연극을 우째 하겄소. 할라면 한 번 해보소.

 

Q. 그럼 그 이후로 다시 연극을 쭉 계속 하신건가요?  

 

김창일 : 그것도 아니에요. 그 뒤로 연출은 조금씩 하긴 했었죠. 그런데 제대로 했다고 보긴 어렵죠. 그러다가 결혼을 했어요. 나는 결혼을 늦게 했어요. 서른두 살에 했는데, 결혼할 때 우리 처한테 마흔 살까진 연극을 안 하겠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마흔 살이 되면 난 연극을 할 거라고 그랬죠. 결혼을 하고 사업을 했어요. 시골에 생활품 보내는 도매상을 했어요. 완도, 진도 지금은 다 다리가 생겨서 차가 다니지만 그 때는 배타고 다녔어요. 근데 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뱃머리에서 배를 기다리면서 연극을 생각했어요. 배를 기다리고 배를 타면서도 이런 장면을 연극으로 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런 세월을 사십 살까지 했어요. 그러다가 사십 살이 되서 집에 와서 처한테 사십 살에 연극을 한다고 했으니 이제 연극을 하겠다고 말하니까, 우리 처가 “당신이 이제 와서 연극을 우째 하겄소. 할라면 한 번 해보소.” 이러는 거예요. 근데 난 진짜 한 거지. 그 때가 87년 도였는데, ‘전국연극제’라는 게 생겨서 거기에 작품을 써봐야겠더라고. 도매상하면서 느꼈던 지방 이야기를 썼는데, 그게 <갯바람>이에요. 그동안 연출은 했었지, 작품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어떤 평을 받을까 걱정을 엄청나게 했어요. 근데 전국연극제에서 2등을 했어요. 지금 말하자면 금상이죠. 그리고 희곡상도 받았어요.

 

Q. 그럼 <갯바람>이 선생님이 작가로서의 첫 작품인거군요. 

 

김창일 : 그렇죠. 전국연극제에서 희곡상을 받으니까 서울 연극인이 전부 김작가라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무슨 작가요, 이제 쓸 것이 없소.” 쓸 것이 없는데 자꾸 작가라고 하면 골치 아프지. 연극을 그냥 하고 싶었던 거지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거든요. 근데 그 다음 해가 되니까 전부 다 작품을 쓰라고 난리에요. 새로운 작품 없냐고 자꾸 연락이 오는 거예요. 근데 가만히 보니까 그 때 전국에서 나오는 작품들이 전부 6.25 사변, 광주 사태를 가지고 썼더라고요. 너무 침울하고 맨날 쥐어짜고 그래. 그래서 ‘야.. 연극이 이렇게만 가면 쓰겄냐.’ 해서 <도시탈출>이라는 희극을 썼어요. 아들 따라서 서울을 간 촌 노인이 어떻게 하면 이 도시에서 탈출을 할까 연구를 하는 내용이에요. 근데 그게 전남에서 또 뽑혀가지고 전국연극제에서 희곡상을 받았어요. 이렇게 희곡상을 계속 받으니까 내가 진짜 작가인가 싶더라고요. 난 원래 연출해야 되는 사람인데, 왜 이러지? 근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또 쓴 게 <안개섬>이에요. 근데 그것도 희곡상을 받았어요. 그 이후에 <붉은 노을 속에 허수아비>로 전국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죠. 

 

Q. 이제는 진짜 제대로 인정을 받으신 거네요?   

 

김창일 : 내가 서울 88 올림픽 때 목표 특별 성화 주자도 했어요. 그 때 지역마다 특별 주자를 하나씩 뽑았거든요. 갑자기 나한테 성화 주자를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 달음박질 못하요. 뭐 그런 걸 하라하요? 난 그냥 연극이나 하게 냅두쇼. 나는 싫어요.” 그랬는데, 아니 시에서 회의 결과가 김창일씨가 했으면 좋겠다고 결정이 났다는 거예요. 그 때 주자들한테 운동복이랑 운동화를 줬어요. 프로스펙슨가.. 난 그 운동화가 욕심나서 했죠. 그때만 해도 밥이나 먹고 살았지. 어렵게 살 때였어요. 근데 막상 잘 나가는 기업들이랑 같이 성화 주자도 뛰고 그러니까 연극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고생이었지만 보람을 느낀 거죠. 이제 시에서도 인정을 해주는 구나 싶고. 그래서 시에다가 목포 시립극단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했어요. 내가 대통령상도 받고 그러니까 시에서도 만들어 주더라고요. 그 때 당시에 목포에 있는 시립단체 여섯 개나 됐어요. 이 좁은 곳에서. 근데 단원을 뽑으려면 심사를 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심사위원을 모셔야 하는데 주는 돈이 한 심사위원 당 5만원 밖에 안 돼요. 대학교수들 데려다가 교통비만 쓰라 이거죠. 이렇게 해서 되겠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서울에서 유명한 사람 다섯 분을 불렀지. 비행기 왕복 호텔에서 이틀인가 주무시고 술사고 뭣 사고 하니까 사백만 원 나오더라고요. 다 내 돈으로 썼어요. 근데 이게 갑자기 문제가 돼버린 거예요. 시에서 나한테 사백만원을 줬는데, 내가 다 먹어 버렸다는 거야. 이런 엉뚱한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내가 조금 잘나가는 것 같으니까 누가 나를 음해를 한 거지. 나중에 오해가 풀렸지만, 이게 참 찝찝한 거죠. 속이 상해서 내가 지부장이고 다 관둬버렸죠. 

 

 

 
 

 상:김창일 씨가 제작한 연극 <산불>의 무대장치 , 하: 김창일 씨가 직접 배우의 분장을 해주는 모습  ⓒ 김창일

 

 

 

- 우리 사위가 고물장수 하는 갑다

 

Q. 상도 많이 받으시고 시에서도 인정을 받긴 하셨지만, 지역 연극인으로서 생활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생활비는 어떻게 버셨어요? 

 

김창일 : 목포시립극단 상임연출가 하면서 대학에 나가서 강의도 하고 그랬어요. 근데 그것도 누가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 때 나갔던 대학이 나주에 있는 동신대였는데, 목포시에서 월급 받는 사람이 나주에 가서 지도하고 대학에 다간다고 누가 신고를 한 거예요. 시에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한 마디 했지. “여보쇼, 내 자식 두 놈이나 대학에 보내고 있소. 시립극단 상임연출 하는데 나한테 돈 얼마줘요? 120만원씩 주는데 그 돈 갖고 내가 살겄소? 그래서 먹고 살라고 나 학교로 나가오. 뭐가 안돼요?” 악을 쓰고 난리 났지. 그러니까 좀 소리 좀 낮추라고. 시장님 듣는다고. “아니, 시장 들으라고 하는 소리에요. 내가 뭐를 잘못했어요. 아 밥을 먹게 해주던지!” 내가 막 큰소리를 쳤지. 그니까 나중에는 암 소리 안하더라고요. 그리고 우리 마누라가 내가 했던 사업을 계속 했어요. 내가 대학 겸임교수 나가고 시립극단 해도 돈 몇 푼 못 벌어요. 우리 애들 대학 보내지도 못해. 애들 뒷바라지하는 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에요. 

 

Q. 무대세트도 직접 만들고 하셨다고 그랬는데, 그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김창일 : 돈이 없으니까 진짜 여기저기서 주워가지고 했죠. 언제는 무대에 옛날 미싱이 필요해서 찾고 있는데, 그걸 살 데가 없잖아. 근데 저 시골에 있는 우리 장인, 장모가 가지고 있는 거야. 그래서 그걸 가지고 오는 거지. 그럼 우리 장모는 그래, “우리 사위가 고물장수 하는 갑다.” 그렇게 소품 하나하나 가지고 가다보니까 나중에 곳간에 별 고물떼기를 다 가져다놨어. 그래서 “이게 다 뭣이다요?” 물어보니까 “자네 언젠가 가져갈 줄 알고 쟁여놨지.” 정말 언젠가는 다 가져가더라고. 그리고 73년도인가? 추송웅씨가 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 이라고 있어요. 그 때 그 분이 목포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조명기가 없다고 그러는 거예요. 이걸 어디서 살 수도 없어요. 그래서 통조림 깡통 큰 거를 내가 쪽을 쳐가지고 안경점에서 렌즈 이만한 거 사가지고 뺐다 박았다 해서 초점 멀리하고 가깝게 하고 하는 걸 세 개를 만들었어요. 다이도 없으니까 벽에다가 박아서 썼어요, 그렇게 만든 거예요. 뺏다 박았다 해가지고 초점은 넓혔다 좁혔다 하니까 추송웅씨가 그걸 보고는 “이 정도면 되겠네요.” 이래요. 그러더니 대본을 주면서 나보고 조명을 하라는 거예요. 그 연극을 한 번도 안 본 놈한테 조명을 하라는 거죠. 돈들이 없으니까 조명기사도 안 데리고 오고 추송웅씨 혼자 달랑 왔거든요. 내가 올라가면 여기 때리고 요리 내려오면 이리 때리고. 그래가지고 내가 앉아서 스위치 세 개 만들어서 이거 눌렀다 저거 눌렀다 하는 거예요. 작품도 안본 놈이. 근데 극 중에서 추송웅씨가 그네 위에서 바나나를 먹어요. 그런데 조명에 열이 닳아갔고 수성페인트 칠한 게 막 연기가 나는 거예요. 근데 추송웅씨는 거기서 계속 보시면서 대사를 하시는 거야. 아 뭐 저렇게 오래 있을까. 나는 미쳐버리는 거예요. 추송웅씨는 일부러 이거 보면서 더 느리게 하는 것 같아. 사람들도 무대 봤다가 조명 한번 봤다가 그래. 그래가지고 공연을 끝냈어요. 추송웅씨가 끝나고 나한테 그 다음에 제주공연이니 나보고 가자는 거야. 전화해보니까 제주도도 조명기가 없다는 거야. 그 때 얼마 준다고 했어요. 4만원인가 5만원인가. 근데 깡통조명기가 안 간다고 했어요. 근데 얼마 후에 그 분이 돌아가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러워. 그 때 따라갈 걸. 그게 워낙 한이 돼. 그게 뭐 창피했나. 그래서 내 가슴 속이 그 생각이 가끔 나. 참 미안했다. 그렇게 조명까지 다 만들고 그랬어요. 그런 세상을 보내고 그랬죠. 참 그 어려운 시대에 연극한다고 별 짓을 다 했어요. 

 

Q. 그 외에도 선생님이 직접 쓰시고 연출한 작품들 무대세트는 어떻게 하셨어요? 

 

김창일 : 나는 그래요. 연극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요. 거기에 맞춰 나도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맨날 옛날 춘향전 하듯이 하고 앉아있으면 누가 저를 부르겠어요? 햄릿도 그냥 햄릿이 아니라 미친 햄릿을 하는 시대인데. 연극인들도 그 시대에 맞춰서 자꾸 변화해야 돼요. 그래서 그 변화를 안 놓치려고 노력하죠. 언제 한번 서울 가서 후배들이 하는 연극을 보니까 막 폐차를 가지고 무대를 만들었더라고요. 그걸 보고 내가 쓴 것이 <역마살>이야.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고물상을 하는 이야기인데, 할아버지는 등에 지게를 지고 가위질 다니면서 엿장사를 했고, 아들은 리어카로 고물을 줍고, 손자는 지금처럼 크게 고물상을 하지.

이걸 쓴 이유가 쓰레기로 가득 찬 무대를 만들면 재밌을 것 같아서였어요. 에어컨, 냉장고들을 다 모아서 찌그러트린 다음에 쇠 색깔로 페인팅을 했지. 이렇게 나는 젊은 애들보다 더 앞서려고 했어요. 그래야 나이 들어도 후배들이 배우러 오고 찾아주고 그러죠.

 

 

 

ⓒ 최재훈

 

 

 

- 난 돈하고 관련된 거라고는 안 맞는 사람이야

 

Q. 쭉 목포에서 계속 연극을 하시면서 보람찼던 일도 많았을 것 같아요.  

 

김창일 : 내가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목포에서 연극을 하면서 기분 좋은 일이 참 많았어요. 지부장 할 때 목포에 안 오신 분들이 거의 없어요. 백성민 선생, 강유정 선생 그런 분들도 나 만나러 목포에 오고 그랬어요. 조용히 술 마시면서 연극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좋았지. 또 돌아가신 권오일 선생도 무인도에서 나랑 며칠 동안 낚시하고 가시고 그랬어요. 정말 손님이 많이 왔어요. 그래도 나는 연극인들이 오면 그렇게 즐거웠고. 그리고 참 많이 도와줬어요. 미추극단 손진책 대표도 목포에서 내가 하는 일이 참 답답했는지, “김창일씨, 내가 윤문식이랑 김성녀랑 같이 와서 여기서 놀부전을 해줄 테니까 여기서 표를 많이 팔어서 좀 챙기시오. 나는 돈 십 원 하나 안 받을 테니까.” 그러면서 목포에서 놀부전을 해줬어요. 윤문식이랑 김성녀가 온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오더라고요. 근데 내가 기획자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갈 때 돈을 얼마 주니까 손진책 대표가 막 화를 내더라고요. “내가 이 돈 받으려고 여기까지 왔냐.” 그러고 갔어요. 민중극단에서도 무료로 낮에는 어린이 극, 밤에는 <아가씨와 건달들> 공연을 해주고 그랬어. 신시 컴퍼니 대표 박명성이도 뮤지컬 <렌트>와 <갬블러> 두 차례 공연을  공짜로 해주고 그랬죠. 

 

Q. 그 분들이 선생님이 생활이 힘드시니까 무료로 공연해주고 티켓 팔아서 번 돈은 선생님이 챙기라고 하셨다는 거죠?

 

김창일 : 나보고 기획해서 직접 표를 팔라고 했던 거지. 근데 막상 그렇게 오면 내가 너무 미안한 거예요. 배우도 배우지만 음향, 조명 시스템이 트럭으로 몇 대 오고 그러는데 그걸 뭘로 감당하느냐고. 그리고 아무리 공짜로 한다고 그래도 배우랑 스태프들 잠은 재워 줘야 될 것 아니야. 그래서 호텔을 잡아서 배우들 재워 주고 밥도 주고 그래야지. 그리고 밤에 술도 한 잔 해야 되고.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목포에 있는 호텔 이사보고 좀 부탁을 했어요. 배우랑 스태프들 좀 재워달라고. 참 내가 여러 사람한테 미안하고 그러더라고. 한 번은 <겜블러> 세트가 일본으로 가기 전 목포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그 때도 박명성이는 돈을 안 받을 테니까 나보고 표를 팔으라고 하더라고. 이틀간 4회 공연이었는데, 표 당 10만 원씩은 받으라 그러더라고. 그래서 “명성아, 목포에서 10만 원씩 하면 되냐. 3만 원씩 할란다.” 그랬어요. 그랬더니 수준이 있기 때문에 3만 원으로 팔면 안 한다는 거야. 근데 목포에서 10만 원짜리 하면 사람이 아무도 안와요. 돈이 비싸서. 저런 거는 누가 초청도 못해. 참 그 때 난 기획하고는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았죠. 난 돈하고 관련된 거라고는 안 맞는 사람이야. 

 

 

 

- 진짜 예술가는 그렇게 못해요. 1억을 받아도 하다보면 돈이 더 들거든.

 

Q. 연극을 오랫동안 힘들게 하셨잖아요. 지금도 연극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힘들거든요. 돈 벌기도 여전히 쉽지 않고요. 연극은 왜 예나 지금이나 힘들까요? 

 

김창일 : 연극 뿐 아니라 예술가가 정말 많아요. 내가 봤을 땐 재능과 관계 없는 사람이 예술을 해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그런 사람이 정책적인 지원금 따는 것은 잘해요. 내가 이렇게 보면서 행정이 정말 잘못됐다는 걸 느껴요. 지금 돈 많이 나와요. 돈 받아서 뭐 하나 보면요, 관객 몇 명 놔두고 우스운 짓하고 있어요. 우리는 그런 시대를 못 살아봤어요. 만약 지원금을 1억을 줬으면 시민들에게 그 이상의 가치를 줘야 되지 않겠어요? 근데 전부 다 지 사업 차렸어요. 지원금 1억을 타면 어떻게 3,000만 원 안에서 끝내볼까 연구만 해요. 지부장 이런 사람들? 자기 사업체에요. 지원금 따먹기가 버렸다는 거예요. 그러니 예술이 살 수가 없어요. 진짜 예술가는 그렇게 못해요. 1억을 받아도 하다보면 돈이 더 들거든. 그럼 내 돈을 써서라도 할 그런 욕심이 있는 놈이 해야 되는데 그런 계산만 하는 놈들만 지원금을 타는 거죠. 

 

Q. 아무래도 지원금이 없이는 연극을 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김창일 : 그래요. 줘야할 사람한테 줘야죠. 예를 들면 지금은 죽었는데 내 친구 중에 최호길이라고 있었어요. 그 친구가 가거도에 살았었는데, 동네 주민들을 데려다놓고 연극을 하고 그랬어요. 언제 한번 만났는데, 랜턴을 잔뜩 사가지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아따 그 많은 랜턴을 어따 쓸라고 그라고 많이 사냐?” 그랬더니, 가거도에서 연극을 하는데 조명이 없어서 사간다는 거야. 조명 대신에 어린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서 이 랜턴으로 무대를 비춘다는 거지. 밤새 동네 주민들한테 연극 가르쳐가지고 사람들 모아서 연극을 하는데요, 사람들한테 연극 보러 오라고 그러면 안 모이니까 막걸리 잔치 한다고 꼬셔서 주민을 모으는 거예요. 그 친구를 보면서 참 유명하든 안 유명하든 무대는 그 어디에도 있다는 걸 느꼈어요. 유명한 사람들만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멋진 예술을 하고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지원금 신청 안 해요. 할 줄도 모르고, 있는 줄도 몰라요. 찾아서 이런 사람들한테 지원을 해줘야 돼요. 정말 지원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봐야 돼요. 전문가가 봐가지고 참 좋은 연극을 관객에게 보여 줄만한 곳에 지원금을 줘야 되는데, 행정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게 평가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요. 평가를 못하니까 지들이 좋을 대로 뽑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삐까뻔쩍 해야 되고, 로비를 잘 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지방은 평론을 하는 사람도 없어요. 정말 정확히 보고 판가름 하는 사람이 없어요. 평론을 하더라도 자기 팀을 위해서 써놓은 거예요. 자기 제자들. 원래 지 새끼는 다 이쁜 법이에요. 한마디로 뭐냐. 아무리 교수라고 해도 공부를 안 한 사람들이 평론을 하고 있어요.

 

Q. 공부라고 하면은 어떤 공부가 필요할까요? 

 

김창일 : 그 공부가 무슨 공부냐면 좋은 연극을 많이 봐야 된다는 거예요. 책만 보라는 소리는 안 해요. 연극의 역사까지 알면 더 좋겠지만 남의 연극을 봐야 돼요. 좋은 연극을. 나는 연극 보러 비행기타고 서울까지 다녔어요. 내가 좋은 연극을 만들고 싶으면 좋은 연극이 뭔 줄을 알아야 좋은 연극을 만드는 것 아니에요.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를 두 번 연출했는데, 맨 처음 그 연극을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연극이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같이 본 대학교수들은 다 별로라는 거야. 그래서 속으로 이상하다, 나만 좋은가? 그랬어요. 근데 나중에 이 연극이 상이라는 상은 다 쓸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역시 연극이 좋으니까 상을 받네요.” 그래요. 내가 속으로 ‘연극을 좀 봐라. 좋은 연극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좋은 연극을 만드는 것이지, 모르고 맨날 만들어봐라.’ 했죠.  

 

 

 

- 아, 예술을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구나.

 

Q. 지금도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죠?

 

김창일 : 지금도 작품 쓰고 연출해요. 어디 분장도 해주고 소품도 만들어주고 무대도 만들어주고 그래요. 그러면 내 용돈은 생기지. 엊그저께도 광주시립극단에서 광주이야기를 써주라 고해서 작품을 하나 썼어요. 올해도 연출 두 편 했어요. 무대장치도 세 편 만들었고. 뭐 이러 저래 하나보니까 일 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어요.

 

Q. 원로 연극인으로서 최근 느끼시는 게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창일 : 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니라서 뭐 모르겠어요. 작가를 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도 요즘엔 내가 예술을 잘했다고 생각들 때가 있어요. 우리 친구들은 할 일이 없어.  그래서 저녁에 술 먹고 친구들끼리 고스톱이나 치고 앉았지. 난 지금 일이 쌓여가지고 죽겠어요. 친구들이 “야 너는 뭐시 그렇게 바쁘냐.” 그래요. 나는 지금도 집에서 밤에 잠 안자고 작품 쓰고 앉아있으니까. 사람들이 “아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라요.” 그러는데, 아니 나이랑 뭔 상관이냐고. 사람이. 이러다 죽는 거지. 사람이 아무것도 남는 것은 없어도 ‘그 사람 연극 좋아서 평생 하다가 이제 저 세상 갔구만.’ 그것만 들어도 어디에요. 그런 맘을 가지고 하죠. 여기 오면서도 내 처가 그러더라고요. “연극하기 잘했소. 그러니까 서울서 취재 온다고 하제. 나는 아무것도 안한께 누가 취재 온다고도 안하요.” 참 우리 마누라가 이제는 연극인이 다 되었어요. 내가 연극 연출 하는 거 보면 정말 전문가가 지적을 하듯이 지적을 해요. ‘너무 루즈하다, 직설적이다, 좀 쳐지지 않냐.’ 그러고 보면 그게 맞아요. 그래서 내가 작품 쓰면 우리 마누라부터 보여주죠. 

 

그리고 내가 원로라고 하는데, 원로도 아니에요. 왜 원로가 아니냐면 내 밑에 하는 애들이 연극을 안 해버려요. 목포에서 연극이 잘 안되니까. 연극이 이제 재미도 없고 그래서 애들이 안 해. 물론 그것이 또 쉬운 이야기는 아니죠. 그냥 애들도 세월이 흐르고 열심히 하다보면 알거라고 생각해요. 돈만 쫓아다니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누가 인정 해주고 안 해주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전에 목포 연극을 하면 알아줬어요. 근데 시대가 이렇게 돼버리니까 아쉽죠. 그리고 돈만 가지고 예술을 할 수는 없어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는 말이 있는데, 나는 후배들한테 그래요. ‘이제야 알듯하니 예술을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구나.’ 이제는 컴퓨터 앞에서 서너 시간 뭐 좀 쓰다가 보면 피곤해서 못하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구상했다가도 잊어버려요. 이제는 예술이 무엇인지 알겠는데, 알만하니까 다 늙어버렸더라고. 그래서 예술을 하기에는 인생이 짧구나 싶어요. 그래도 연출하면 힘은 나요. 지금도 애들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연습시키면서 한 번을 앉지를 않으니까 학생들이 “아따, 선생님 건강하십니다.” 이러는데 그게 건강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고 끝나고 나면 다리도 아프고 죽겠어요. 그냥 그 때만 그 열정에 미쳐서 안 아픈 거지. 

 

 

 

 


/ 인터뷰이 소개

 

김창일 

원로 목포연극인으로서 <갯바람>(1987년)을 시작으로 <도시탈출>(1988년), <안개섬>(1989년), <붉은 노을 속에 허수아비>(1998년) <막차타고 노을보다>(2011) 등으로 전국연극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극단 ‘선창’ 대표, 한국연극협회 목포 지부장, 목포시립극단 상임연출가를 역임했으며 동신대학교 연극영화과 겸임교수로 지내기도 하였다.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 중으로 현재 차기작 <양림동산의 수레>를 준비 중이다. 

 

 

 

  

 

  

인터뷰/글 : 현승인 (funkali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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